또 다시 3월이다.

모든 사람들이 새로운 학교에 입학을 하고,

이전까지 전혀 알지 못하는 분야에 대해서 전공지식을 갖추는 도착 지점에 안착하게 된다.

그 중에서는 단순히 학교의 이름만 보고 온 학생들이 다분 할 것이고

단순히 특정 전공이 아닌 학교를 위해서 점수를 맞춰 입학할 것이다.

한국도 몇 십년 전에는 학과를 기준으로 학생들을 줄세웠다.

이렇게 과목이나 전공 별로 줄을 세우는 것은 현재 의대, 치대, 특수목적 학교를 제외하면 전무하다.

학교의 다양성이라는 명분과 사회적 보조(?)라는 명분으로 농어촌 특별 전형이 있는 등

우리는 모호한 기준의 평등을 달성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사회를 살아가고 있다.

아무튼 그렇게 들어보긴 했지만, 유망하다는 과에 진학을 하고

전과 또는 복수 전공을 통해 학위를 받을 수 있으니 점수에 맞춰 학과를 선택하는 등,

되려 학과의 다양성, 학문의 다양성이라는 말을 꺼내기 부끄러울 정도로 현재의 입학 시스템은 변질되었다.

미국처럼 특정 학과의 수용 인원을 2~300명 씩 받지 않는 것과 대조적으로

전공은 곁다리로 생각하고 취업에 유리한 전공에 힘을 쏟는 일이 빈번하고,

대입 장사치들은 이딴 것을 전략이라고 내세워 시스템을 이용하고 있다.

시스템을 만드는 사람들이 스스로 시스템에 복종하는 인간의 본능인 ‘항상성’에 비추어 봤을 때

하나의 시스템에 적용하고 난 뒤로 변하길 꺼리는 것을 감안하면 나처럼 시스템을 욕하지만,

되려 안주하고 정착한 사람들의 지지를 기반으로 변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

뭐 어쩌겠는가, “타산지석” 하라고 그렇게 열심히 정리한 역사를 배우라고 떠들면서 하는 짓은 정반대인 것을

문이과도 통합된 판에 도대체 왜 학과 정원을 제한하는 합리적인 이유를 찾아 볼 수 없다.

돌 같은 뇌를 바꾸기를 꺼려하는 시스템의 관리자들의 무책임함 때문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측한다.

직책과 상관 없이 자신과 주변 친인척, 지인의 실리와 상관 없으면 그냥 월급만 받는 자리라고 생각할 것이기 떄문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대부분의 학생들은 자신의 전공을 받아 들일지

아니면 취업에 유리한 학과로 전과를 할지, 혹은 편입이나 다시 ‘수능’을 볼 것인지 고민한다.

아무튼 그렇게 공부를 시작하고 나면 대다수의 학생들은 자신이 뭘 할지 모른다

그동안 시스템을 이용하기만 했지, 자신이 뭘 공부하고 싶은지 고민조차 안 해봤기 때문이다.

너무 당연한 일

사회는 그렇게 처음 4년부터 졸업하고 면접장에 오기까지 그 동안 업무를 위해서 무엇을 했는지 조사를 한다.

응시자는 진술서를 함께 제출해서 자신에 대한 간략한 소개를 한다.

관련 실무 경험을 했기를 바라는 회사 측과

자신이 뭘 하고 싶고, 뭘 할지도 모른 채 살아온 학생들은

사회가 잘못되었다고 목 놓아 외친다.

아, 예전 7-80년 대처럼 강력한 연대 의식이 있는 것은 아니라 시위하는 것은 꿈도 못 꾼다.

데이터에 자신의 이름이 적재되는 순간, 사내 반동분자로 물을 흐릴 수 있을 수 있다는 낙인이 찍힐 수 있기 때문이다.

부양 인구가 2010년대 최저점을 찍고 다시 가파른 성장 곡면에 접어든

저성장 시대에 한국 뿐만 아니라 다른 사회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개인에게 있어 다양한 즐길거리와 삶의 질은 과거의 개인에 비하면 평균적으로 윤택하지만,

개인이 모인 집합과 연대와 사회 소속감은 처참할 정도로 허물어졌다.

‘도덕’이라는 만인의 최후의 무기는 어떤 명분이든 간에 허물 수 있는 기이한 힘을 가진다.

맞는 말을 해도 그 사람의 사적인 일을 모두 뒤져 도덕적으로 결함이 있는 사람으로 낙인을 찍어

메세지는 메신저와 함께 더러운 것으로 치부되기 때문이다.

이 모든 현상은 사회의 인구구조, 사회적 인식, 등 모든 것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을 것이고,

‘데이터’의 축적 또한 시스템을 더 강력하게 통제하고 서로 감시할 수 있는 구조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상한 나라의 이상한 전공

남들이 하니깐 나도 한다

혹시 모르니깐 나도 한다

업계에 대한 조사도 안하고, 그 기술이 무엇인지도 알아보지도 않고

관련된 기술을 배우고 일 하면 돈 준다니 일단 따라 배우겠다는 사람이 우후죽순 늘어나고 있다.

특히, 소프트웨어 개발 인력이 부족하다고 6개월 교육 후에 현장에 투입되는 사회를 보면

아무리 불가항력의 시스템 속에 살아간다고 하지만, 이렇게 무기력하고 수동적인 삶을 살면서

왜 행복하지 않냐고, 왜 워라벨 못하냐고 말하는 것들을 이해하기 사뭇 힘들다.

물론 자신이 원하는 일과 업계에서 요구하는 일, 그리고 돈이 되는 일의 격차는 크다.

그러나 처음부터 자신이 뭘 해야할지도 모르는 채

일단 ‘시키라는 대로 했어’라는 만능 변명으로 살아오며, 사회에 책임을 묻는 사람들이 많다.

그렇게 점수에 맞춰 학교에 입학한 학생들은 현타를 가진다.


이 문제는 시스템과 개인 상호간의 책임이 있다.

정해진 규격의 노동력을 양산하기 위한 시스템 속에서

‘전공’과 ‘졸업장’을 위해서 자신이 정말로 좋아하는 지, 취업을 위해 필요한지도 모르는 것에 4년간 시간과 비용을 쏟는 것

그 속에 던져진 ‘뭘 할지’, ‘좋아하고 하고 싶은 것도 없는’ 개인.

환장의 콤비네이션 속에 저성장 국면이 발화점이 되면서 헬조선이 시작되었다.

가장 시급한 것

가장 시급한 것은 전공 수용 인원을 늘리거나,

대학 네임벨류 정체성을 프랑스처럼 지우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변화다

일단 뭘 하고 싶은지 찾는 것이 가장 시급하다.

프로그래밍이 많이 보편화된 현재 이론적으로 만들지 못하는 것은 거의 없다(일반인의 수준에 있어서).

실력이 안돼서, 말로만 공부해서, 그냥 네가 게을러서가 이유다.
(생계 자체가 급한 일부를 제외하면 다 해당 되고, 나 또한 그렇다)

공부해야 된다는 것을 알면서, 노트북을 열어두고 전공책을 펼쳐놓고

핸드폰으로 게임을 하는 모습을 스스로 보지 않더라도 인식할 수 있는게 정상 아닐까?

노년층에 대한 책임 떠넘기기도 혐오스럽다.

10대, 20대, 30대, 40대, 50대, 60대 모두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반사회적인 사람들의 비율은 모든 세대에 각각 일정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여론이 모두 공평하게 다루지 않았을 뿐 나이와 상관없이 모두 공평하게 배분되어 있다.

품성이 훌륭한 사람이 한 세대에 5%가 있다면 사회의 5% 밖에 존재하지 않는 다는 의미며,

10대 20대 또한 마찬가지라는 의미다.

틀딱이네, 좆팔육이네 뭐네 하는 것은 10년이 지나도 현재 좆팔육이 모두 죽은 50년 뒤에도

단어의 형태(외연)만 다른 같은 의미(내연)의 단어가 계속 존재할 것이다.

부, 지적 능력과 상관 없이 가질 수 없는 ‘나이’라는 것을 무기로 자신의

도덕 잣대를 만들어 사회에 책임을 떠넘기는 짓은 상당히 위험하다.

아무리 연대가 적은 세대랄지라도 자정능력이 떨어지고,

내가 마음에 들면 ‘배울 분’, 마음에 안들면 ‘좆팔육’이라고 붙일 수 있는 모든 사람이 스스로가 재판관이기 때문에

변해야 한다는, 혹은 위기감, 개선의 의지를 느낄 필요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책임

책임 소재, 혹은 문제 원인을 스스로 묻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2형 당뇨병에 걸린 사람에게 의사가

“니가 그렇게 쳐먹었으니깐 당뇨가 걸리지”라고 말은 못한다.

물론 맞는 말이지만, 스스로 책임지는 것은 99.99% 인간이 하기 싫어하기 때문이다.

만약 모든 사람들이 스스로 문제의 원인이라는 것을 알고 최소한 인정이라도 했으면

종교 따위는 필요 없었을 것이고, 지금 쯤 인류는 여름 휴가에 화성 여행도 다녀왔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책임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상당한 부담을 동반한다.

학원에 돈을 내서 얻는 가치는

“네가 공부 안하면 지랄해주는 것”이다.

공부는 누가 머리에 메모리 칩을 삽입해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결국 본인이 공부해서 습득해야하는 것이다.

공부에는 ‘왕도’가 없다는 말이 있듯이, ‘왕’도 공부를 못하면 왕 책임이다.

차마 그렇게 말했다가는 목숨이 위험하니깐 못하지.

마찬가지로 교육 종사자들은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수강생들이 잘못했다고 절대 안한다.

기분이 조금이라도 토라지면 그 서비스가 잘못했다고 책임을 떠넘기고

널려있는 다른 교육 서비스로 옮겨, 오냐 오냐 좋은 소리를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봤을 때 “팩트폭력”을 당하는 사람은(공부나 운동이런 측면에서) 해주는 사람에게 고마워 해야한다.

다시 전공 관련으로 넘어오면

뭘 공부할지 모르는 사람들은 “뭘 하고 싶은지” 먼저 찾는게 시급하다.

그리고 그에 필요한 기술에 대해 공부하면 된다.

학교가 시키는 대로 잘 한다고 취업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다.

학교에서 시키는 대로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시키는 대로 한다고 인생이 행복해지고, 더 이상은 고통은 없다고 혼자 망상을 펼치지 말라는 것이다.

인공지능에 비해 상대적으로 인간이 우위를 갖는 것은 지식의 조합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4년 동안 국어 국문학과를 전공한 뒤로 자연어처리 연구원으로 참여해 자신의 지식을 활용할 수 있는 등

절대 하찮은 전공 지식은 없다.

다만, 말 했듯이 제대로 공부 안 해놓고

일단 엄마가 가라는 대학은 갔으니 어떻게든 졸업하면 누가 취업 시켜줄거라는

이따위의 망상을 가지고 있으니 인생이 불행해지는 것이다.

헬조선을 만드는데 스스로도 기여하고 있다는 점을 절대 잊지 않길 바란다.

경험

대학 시절에는 경험이 중요하다고 한다

맞는데 경험이라는 대의명분으로 모든 것을 정당화하는 것으로부터 문제가 발생한다.

책임, 마지막

모든 일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짊어 지는 것은 정신적으로 피폐함을 초래한다.

정신적으로 감당이 안되기에 괜찮다는 말을 많이 한다.

책임을 혼자 온전히 받아 들이고 감내할 수 있다면 괜히 사형수 집행인이 3명일 이유는 없다.

동아리

동아리에 이런 이벤트를 만들려고 고민중이다.

만들지 못하지만,

이런 기계, 서비스가 있으면 좋겠다~ 하고 마치 실제로 있는 제품인 것마냥 소개하는 대회다.

나는 빈 A4 용지에 그림을 그리면서 이런 서비스가 있으면~ 혹은 이런 제품이 있으면~하는 것들이

클리어 폴더에 꽂인 것이 100 장 이상 된다.

그 중에서 한 번도 만들어본 것은 없지만, 그럴싸 한 제품을 상상으로 만들면

컴퓨터나 소프트웨어가 아니더라도 눈에 맺히는 상을 알아보기 위해

눈의 구조나 안경학, 빔 프로젝터가 화면을 어떻게 조사하는지 등등 조금이나마 공부해보는 등

나만의 흥미를 찾기 위해서 노력중이다.

이 모든 것은 경험과 자신의 노력으로부터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상금이 있는 대회로 주최해 일주일 동안 자신이 만들고 싶은 제품이나 서비스를 만드는 것을

‘상상하는’ 연습을 많이 시키고 일상화되었으면 좋겠다.

..

역시 오늘도 카페에 앉아 의식의 흐름대로 써내려 갔다.

나는 어떤 주제(?), 생각이 있으면 머리 속에서 잊어도 금방 떠오르고 계속 맴도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이렇게 글을 쓰면 속이 시원해지는 느낌을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