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는 ‘학년제’
[1년 단위의 느낌을 주는 사진 + 수능 사진 나란히]
수능이 바뀌고, 필수과목도 바뀌면서 절대적인 진리처럼 견고하게 유지되어 있는 학년제는
수 많은 변화가 주변에 있어도 논의대상에 오르는 것 조차 보지 못했다.
그러나 최근에 대학과 같이 학점을 통해 졸업을 할 수 있는 교육제도가 등장하면서
대학과 같은 수업 방식, 학기 중 자신이 선택적으로 휴학을 통해 새롭게 체험을 한다는 등,
아직은 제한적이나, 자신의 선택에 따라서 원하는 과목에 단순히 입시만을 위한 공부가 아닌 흥미를 더 추구할 수 있는 기회가 열렸다.
스스로 변화할 수 있는 시기를 놓쳐, 타인에 의해 강제로 변하게되는 순간이 가장 고통스러운 것만큼
교사들도 시스템에 도축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강제로 변화하는 모습이 되질 않기를 응원한다.
((도축장이랑 교대 사진))
아무튼,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면 한국이나 전 세계적으로 1년 단위의 학기 제도에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1년이 아닌, 대학처럼 학점제도를 도입함과 동시에 6개월 단위 체제로 개인의 필요에 따라서 졸업할 시기를 결정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대학과 유사한 형태처럼 자신의 필요에 따라 한 학기에 많은 학점을 등록해 빨리 졸업을 하거나
개인적인 체험이나 실제 현장에서 일을 해 볼 수 있는 실습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기업의 사회적 환원의 일종으로 운영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하나의 학년이 아닌, 자신이 다닌 총 학기와 총 학점을 통해 졸업 여부를 결정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학교를 다니면서 인격체를 형성하고, 인성 함양을 위한 의무적인 교육은 그저 일괄적이고 대량 생산을 위한 편의성으로 보인다.
지금도 그렇게 비판하는 수능도 그렇지만, 단순히 지식이 아닌 사회성을 기르기 위해서
같은 공간에 3년 동안 귀속되어, 같은 사람끼리 1년을, 그리고 비슷한 무리를 3년 동안 같이 있는게 선진 교육이라고 내세울 수 있을까?
((같은 학교 사진 3개 그리고 3년의 시간))
학교를 하나의 공간에 지속적으로 묶어 두는 것은 학교 폭력을 만들어내는 마치 콜로세움과 같은 분위기를 형성한다.
전학이라는 단어가 부정적인 어감을 가지고 있는 것은 교육의 구세대들의 잔재다.
마치 전학이라고하면 학교에서 쫓겨나 듯이 도망치는 모습을 연상케 만드는 3년이라는 구속구는
필수 교육과정과 대입이라는 인질을 두고 학생을 내리 찍는 권위주의적 모습을 지닐 수 밖에 없다.
자신의 선택에 따라 학교를 선택하고, 추첨을 통해서 한 아이의 삶을 3년 단위로 통째로 한 학교에 귀속시키는 건
단순히 어른들의 편의를 위해서 젊은 세대를 시스템을 핑계로 억압하는 것에 지니지 않는다.
비슷한 지역군 간의 교사 간의 교류와 통합 된 시험을 통해 학교간의 내신 편차를 줄이고,
순환 근무제를 통해 정주성을 막아 고인물을 형성하는 것을 막아야한다.
((고인물 사진))
1년을 단위로 학년을 구분 짓는 것은 그들이 그렇게 주장하는 청소년의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한 시기에 큰 리스크를 만드는 주범이다.
1년 단위로, 모든 것이 매년 빠짐 없이 학생들을 몰아붙이기 때문에, 하나라도 놓치면 뒤쳐지게 보이는 모습을 띄게 했다.
같은 나이라는 집합체를 견고하게 만들어, 나이에 따른 표준화 된 삶의 구조를 서로가 서로에게 강제하는
서로 구속구를 씌워주는 인간의 저주이차 축복인 사회성이 발현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1년이라도 학교를 늦게 시작하게 되면 마치 문제라도 있는 아이처럼 치부하기 일쑤고,
대입에 실패해 재수라도 하면, 어깨를 당당히 피지 못하고 측은하게 여기는 사회적 인식이 널려졌다.
((노예 12년 영화 포스터, 지친 학생))
나이 많은 사람들은 이제 60대는 노인이 아니니, 평균 수명 100년이라는 말을 하면서 고작 1~2년은 아무것도 아니라면서 떠들어대는 것과 반대로
초,중,고등학교라는 정해진 단계와 매년 연속으로 다녀야하는 장장 12년이라는 틀을 박아놓고
자신들은 예외라면서 이중적인 태도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학기를 단위로 졸업 기준을 만든다면
자신의 전문 분야, 혹은 지원하고 싶은 진로에 대해서 학교에서 채워줄 수 없는 부분이라면
학교가 아닌, 외부 전문 교육을 통해 자신의 적성에 맞는지 확인도 해보는 시기를
6개월의 휴학기간을 총 2번, 즉 1년의 여유 기간을 통해서 중간 중간 점검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해야한다.
학교에서 수능을 준비한다고, 내신을 준비하다고 시덥잖은 시험 문제를 준비하는 현재의 교육체계는
사회적인 공동 교육 수준을 맞추기는 커녕, 있는 재능을 살리지도 못하게 남들 눈치나 보게 만들어서
재능을 죽이는, 스스로 멸망을 자초하는 썩은물 그 자체다.
현재 존재하는 선천적인 재능이 많이 요구되는 예체능 계열만봐도
예체능은 공부를 당연하듯이 포기를 하고, 시험지를 다 찍고 나오는게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진행되는게 정상인가?
서로가 그토록 싫어했던 엘리트 주의를 방관하고 있다.
엘리트 주의가 아니라도, 꼭 ‘운동’한다는 애들은 공부 안시키고 운동만 시키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데
‘운동’말고 요리, 프로그래밍, 등등 다른 분야에 탁월한 능력을 보이는 애들은 단순히 특이한 취미가 있는 것마냥 여기는 것이 상당히 불쾌하다.
12년의 기간 중간에 6개월만이라도 호기심이 있는 진로를 직접 선택해서 체험해보고, 연계까지 해줄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수능이라는 큰 목표를 앞만 두고 달리는 학기 생활 중에 과연 쉴 틈도 안주면서
프로그래밍이니 뭐니 떠들어대는 마당에 진짜 자신이 흥미가 있는지, 진로에 맞는지 제대로 결정할 수 있을까?
프로그래밍이 중요하다니깐 수능 과목으로 넣자는 병신들이 있는데,
취업 잘 된다고 일단 뭣도 모르고 프로그래밍 관련 학과에 꾸역 꾸역 들어오는 사람들을 보면
자신들이 뭘 하는지도 모르고, 꿈도 없고, 희망도 없고, 그저 취업만을 위해 12년 + 4년이라는 기간을 쓰게 될게 보인다.
사회적 틀에 끼워져서 살아가다가, 자신의 진짜 적성을 찾아 떠나겠다고 16년이 지나서야 그 때 하겠다는 일부 소수의 사람을 제외하면
사회적으로 행복할 수가 없는게 너무 당연한거다.
그런데 일단 프로그래밍이 중요하고 돈이 되니깐 프로그래밍을 시키자
?
개인의 행복을 위해서 노력은 하는 건지, 신경은 쓰는 건지…
건설판에 인력이 부족한데 다 거기 가서 막노동시키고 싶을 지경이다.
(( 어떤 사진 ))
자유롭게 시기에 따라 학기를 선택적으로 들을 수 있는 환경
유연한 학기제는 학기 제도가 다른 외국인과의 교류를 더욱 더 원활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우리가 매년, 애들이 직장에 다니듯이 계속해서 교육의 현장에 있는 것은
의무 교육이라는 정당성을 얻은 정치 논리처럼 누구나 반박하는 것으로부터 막는
일종의 ‘신성불가침’ 영역에 들어선 것 마냥 되었다.
부모가 해줄 수 없는 것을 대신 해주는 역할로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순간을 매년 그것도 짧은 1~2개월의 방학기간은 여름을 제외하면 연말과 연초에는 부모님이 부모님대로 바쁘다.
초등학교를 넘어, 선택적 학기와 학점제로 빨리 졸업을 해서 직접 현장에서 일을 할 수 있도록하는 경험을 제공하는 것에 장점이 있다.
1년 단위의 교육과정과 쉴 틈 없이 달달 볶는 형태는 정책적으로 일 처리하기 좋겠지만,
6개월 단위 학기제를 운영함을 통해, 스스로 필요함에 따라 특별한 경험, 유학에 유동성을 공급하고,
짧은 학기제를 통해서 더욱 더 실험적이고 선구적인 교육방법을 찾기에도 원활해 지게 될 것이다.
설사 학기 중 할 수 있는 휴학을(예를들어 1학기, 6개월 단위로 2번) 최대로 써서 수능을 본다고 해도
이미 재수, 삼수, 사수생들이 즐비한 상황속에서 수능시험은 치뤄지기 때문에
시간으로 공정함을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으며, 잇다고 한들 스스로 수능을 안봤을 뿐, 재수를 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이왕이면 시험을 빨리 보는 편으로 하지, 늦게 보지 않으므로 기존에 있던 차이(차별 아님)는 무마할 수 없다.
결국은 실용성과 효율성의 문제
사회 시스템은 효율적으로 돌리는 것이 목표다.
하지만 그 효율성을 달성하기 위해서 하나의 틀을 만들어
장장 12년의 기간을 학교라는 장소에서 지내게 된다.
마치 단순 노동을 하는 근로자가 마지못해 월급날만 오기를 기다렸다가
월급이 들어오면 다시 근로 의지가 생기는, 노예와 다를바가 없는 모습을 보인다.
기술과 전산은 고도화 되었지만, 안정성을 탓으로 아직도 서류로 작업하는 곳이 수두룩하다.
사람은 사소한 것이라도, 아무리 잔인한 일이라도 계획대로 진행이 되어야 안정감을 느낀다.
그래서 사회라는 살아있는 군집이 안정성을 위해서
젊은 세대를 12년에 걸처 꾸준히 양성시켜서 노동시장에 어떻게든 투입을 시키려는 행보를 보인다.
교사라는 사람들은 시스템을 탓하고,
시스템 관리자는 관습을 탓한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 시스템 속에서 태어난 정치인이
새로운 세상을 만들겠다고 떠들어대고 사람들은 좋다고 그걸 믿는 것이다.
개미처럼 계급와 역할이 나눠져있고, 무리지어 사회생활을 하는 동물은
돈처럼 지속적인 순환을 필요로 한다.
1년을 주기로 꾸준히 학생이 나와야 물건을 팔아먹는 사람이 살 수 있고,
1년을 주기로 졸업하는 학생이 있어야 노동력이 꾸준히 투입될 수 있고,
모든 것들이 1년을 주기로 계획대로 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심리가 시대에 따라 투영되는 것이 사회이고,
변하는 것 역시 투표든 여론이든 변화하는 생각이 투영되는 것이다.
물론 맨날 ‘어쩔 수 없다’라는 말을 내뱉는다
어쩔 수 없다.
참 하기 쉬운 말이다.
정치인부터 소상공인까지 자신의 무력함을 내세워 면책을 하고 싶은 자들의 말이다.
그래서 세금과 법으로 적혀져있는 국방의 의무와 같은
책임을 분산하거나, 강제하는 사회 시스템을 만들어갔다.
사람의 평균 수명이 늘어나고,
4~50대는 아직도 청춘이라고 떠들어 대는 이 세상속에서
왜 1~20대는 그렇지 못하는지, 혹은 자기들은 어차피 나이도 먹었고 관여할 바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그런지 변화의 기미가 없다.
신체가 급 성정하고, 학습에 유연한 뇌의 상태라’어쩔 수 없다’라는 핑계를 들을게 뻔하지만
그렇게 유연한 뇌의 상태를 가지고 있는 시절에 일관화된 교육 체계를 주입하는게 과연 맞는지 의문이다.
한 지역에서 비슷한 애들끼리 한 우물에 갇혀서 12년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정말로 맞냐고.
경기도 사는 애들이 대치동으로 학원 다니는게 더 다양하다고 볼 수 있다.
최소한 고등학생 시절 한 평생 비슷한 지역에서만 살았던 애들보다 더 다양한 지역을 오고 가고 지냈으니깐 말이다.
마무리
유치원은 일산 솔거유치원에서
초등학교는 싱가폴 약 2년, 그리고 나머지는 송파구 오금동 오금초등학교에서
중학교는 서초구 반포 신반포중학교에서
고등학교는 서초구 상문고등학교에서
대학은 노원구 광운대를 다니고 있다 (…)
내가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나와 비슷한 지역에서 살아온 친구는 없다.
전무하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늘 새로운 사람과 만날 수 밖에 없었고,
오랜 친구를 연줄로 누구를 만난다거나 깊은 유대감을 쌓는 그런 일은 없었다.
떠돌이 신세와 같다고 볼 수 있지만, 다양한 지역과 늘 새로움이 강제되는 탓에
자연스럽게 제 3자 입장에서 보는게 내재화 된 것 같다.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지역에 애정을 갖는다던지, 어느 단체에 대한 소속감이라던지
연대감, 유대감을 몸으로 겪을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었다.
물론 지금은 다시 컴퓨터와 관련된 우물에 들어가 있지만,
그래도 우물을 왔다 갔다 이동해보고 다른 우물도 본 개구리가
한 우물에만 있는 개구리보다 시야가 넓을 수 밖에 없는 건 사실이다.
글을 쓰다 멈추기를 여러 차례 반복하니 글의 파편화가 너무 심해 이쯤으로 끝내려고 한다..